김죽파가야금산조를 전공하였지만, 이 분의 태어나 살아온 길을 대략으로만 알고 있었다. 궁금했다. 매일 죽파가야금산조를 연습하면서 더 깊은 음색을 내고자 하지만, 잘 안되어 명인 김죽파 삶을 알아보면 답이 있지 않을 싶어 명인 김죽파의 삶에 대해서 찾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김창조의 손녀로 태어났지만, 김죽파명인의 삶은 결코 순탄지하지 않았다.
죽파가 기억하는 조부의 말씀은 "가야금은 재주로 타는 것이 아니라 혼이 손에 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장작 패듯 하여서는 안되고 잔잔한 호수에 잔물결 치는 소리로 나가다가 별안간 물 속에서 용 못된 이무기가 한 번 용트림하여 솟아올랐다가 내려가 막 물이 출렁거리고 거품 내듯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다. (전해내려 오는 이 말이 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무슨의미인줄 알거 같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탄생시킨 김난초(金蘭草 1911-1989). 호는 죽파(竹坡)로 우리에게는 김죽파로 더욱 알려져 있는 가야금명인이다. 죽파는 비록 가야금산조의 명인 김창조의 손녀로 태어났지만, 예술인으로서의 그녀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파의 탄생부터 살며보면 1911년 2월 19일 전남 영암군 영부면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김낙권(金洛權)과 모친 오(吳)씨의 첫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생후 10개월만에 열병(장질부사)으로 사망하여 조부 김창조와 조모 임(林)씨의 손에 자라게 된다. 조부 김창조에게는 죽파 아버지인 김낙권(金洛權)과 딸(판소리 명인 오수암의 모친)이 있었다. 죽파의 증조 할아버지는 한학자였으나, 조부인 김창조는 어려서 서당에 다니는 것보다 음악에 미쳐 살다시피 했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 조부가 밤에 홀로 앉아 가야금을 타는 소리를 죽파가 잠결에 들으면 '음색이 사각사각하여 잘 익은 사과를 깍는 소리'가 났었다 라고 한다.
명인 김죽파 가야금의 시작하게 된 이야기
죽파의 7세 무렵, 사랑채에서 조부를 흉내내어 가야금을 타는 것을 우연히 옆집 할머니가 들었다고 한다. 사랑채에 풍류객은 없는데 풍류소리가 나고 조그만 신발이 하나 있는 것이 기이하여 문구멍으로 보았다가 조그만 죽파가 타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조모에게 가야금 가르칠 것을 권유하였다. 조모는 조부에게 이 일을 알리니 조부는 죽파에게 "많이 들어서 배우지도 않았지만 가야금을 탄다니 가야금을 한 번 타보아라"고 권유하였다고 한다.(타고난다 라는 것이 이런것이 아닌가싶다) 죽파의 가야금 연주를 들은 조부는 아무 말씀은 없었지만, 죽파가 7세 때 가야금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으며, 죽파가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광주로 이사 온 후인 8세부터였다. 조부는 죽파에게 풍류(세령산부터 굿거리)를 15일 만에 마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다. 광주 집은 서대문 밖에서 살았는데 방이 2, 3칸 정도로 영암의 집에 비하면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매우 초라하였고, 모든 것이 영암 때처럼 풍요롭지 못했다. 광주로 이사온 해에 죽파는 광주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죽파는 전주 권번에 조부를 따라갔다. 틈틈이 조부로부터 풍류, 산조, 병창 순으로 학습하였다. 조부는 가야금을 가르칠 때는 항상 풍류부터 가르쳐 주었다. 또한 조부는 가곡을 배워야 한다며 당시 전주에서 유명했던 장님 가곡 선생님이었던 김복실(金福實)로부터 가곡을 배우도록 하였다. 전주 권번에서 죽파보다 나이 많은 기생들은 조부에게 배운 것을 잊어버리면 조부가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해 "난초야 나 좀 가르쳐 줘, 여기는 어떻게 하니?" 하고 청하곤 하여 죽파는 기생들에게 산조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조부에게 학습할 때 조부는 매우 엄격하였으므로 꾀부린다고 야단을 듣기도 하였지만 못한다고 야단 듣지는 않았다. 광주에 홀로 사시는 조모가 "난초가 몹시 보고 싶다"고 전주 권번으로 자주 연락이 와 죽파는 조부와 함께 7, 8개월 간의 전주 권번 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돌아갔다.
광주로 돌아온 몇 개월 후 조부는 인후염을 앓기 시작하였다. 조모는 병으로 고생하시는 조부에게 거문고 술대 같은 대를 목에 집어넣고 훅 불어주면 가루약이 목젖 안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면 밀가루 같은 약은 목젖 양쪽으로 엉겨 붙었다.
1919년 죽파의 9세 시절, 3·1 운동이 일어났고 그 해 초가을 조부는 인후염이 심해져서 2, 3개월 앓다가 사망하였다. 조부가 사망하자 죽파가 가야금 타는 것을 몹시 싫어하던 아버지는 조부가 살아 계실 때는 감히 말리지 못했으나 사망하자 조모와 함께 황해도 해주로 올라가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죽파를 공부시켜 시집보낸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해, 죽파는 광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남천으로 전근하신 아버지를 따라 갔다. 이 때 남천에는 새로 학교를 짓고 있는 중이었다. 죽파가 계모에게서 태어난 6세 밑의 여동생과 놀면서 산조구음이나 소리를 흥얼거리는 소리를 계모가 듣고 아버지께 고하였다.음악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버지는 회초리로 죽파를 몹시 때렸다. 계모가 직접 야단치지 않고, 아버지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른 것이 서러워 조모와 죽파는 밤새 울었다.
조모는 태어난 지 10개월만에 생모를 잃고 자란 죽파를 극진히 사랑하였으므로 계모 밑에 두었다가는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그 다음 날로 죽파를 데리고 전라도 목포로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명인 김죽파의 역사적인 만남! 진정 가야금연주가 삶
조모는 8년 기간을 약정하고 양부모를 정해 주었다. 양기환이란 양아버지는 친자식이 없었으므로 죽파 이전에도 이미 박향초란 양딸이 있었다. 박향초는 죽파 보다 2세 위로 소리도 잘했거니와 춤을 잘 추었다고 한다.
당대 유명한 남도 음악가들은 한량인 양기환의 집에 자주 모여들곤 하였다. 이 때 자주 놀러온 음악가로는 한수동(韓洙東 1895-1929)이다. 한수동은 키가 크고 잘 생겼고, 가야금 성음은 무겁고 난잡하지 않았다. 한수동은 죽파보다 10세쯤 위였고 34세에 요절하므로 제자를 두지 못했다. 그 당시 가야금의 명인으로는 한성기(韓成基 1899-1950), 안기옥(安基玉 1905-1968), 한수동, 최막동(1902-1950) 등을 꼽았다. 죽파가 11세가 되던 해, 죽파에게는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양부모의 배려로 조부의 수제자로 영암 집에서도 가끔 보기도 했던 한성기를 양부모집에 초빙하여 약 3년을 같이 살며 학습하게 된 것이다. 이 때 한성기는 다른 제자는 일체 가르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죽파만을 가르쳤다고 한다.
양부모는 한성기에게 레슨비는 요즘처럼 한달 씩 계산하지 않고 산조 한바탕 떼는 데 얼마씩으로 하여 주었다. 때론 아편 값도 대 주었는데 그런 때에는 가야금을 더 잘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공부 방법은 한성기에게 독방을 주고 새벽녘이 되면 양어머니가 죽파를 깨워 공부하라고 독려하였고, 새벽 공부가 끝나면 아침을 먹었다. 조금 쉬었다가 오전에 공부하고, 점심 먹고 조금 쉬고 공부하고, 저녁 먹고 자기 전에 또 공부하였다. 공부는 하루에 5, 6회씩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죽파 산조의 골격은 김창조에서 한성기로 이어 내려온 것으로 김창조가 타는 산조는 약 30분이었고, 한성기가 타는 산조는 약 35분이었다.죽파는 전라남도 강진의 회갑 잔치에 초대받아 한성기와 함께 갔는데 이것이 죽파의 첫 출연 무대였다. 조그마한 체구의 어린 나이(11세)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큰 가야금을 잡고 아래음 낼 때는 손이 짧아서 가야금을 잡아 당겨 소리를 내고, 또 위로 했다하면 관중은 귀여워하였다. 행하(行下)도 받았는데 얼마였는지는 기억에 없다고 한다. 당시 전라도에서 인력거가 없어 죽파가 연주하러 갈 때는 어른들이 업고 다녔다. 12세(1922)부터 13세(1923)에 이르기까지 김창환이 이끄는 협률사에 참가하여 광주, 진도, 해남, 강진 등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협률사의 공연내용은 앞부분에는 판소리(토막소리),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 잡가(육자백이, 자진육자백이, 보렴, 화초사거리) 등을 하였고, 뒷부분에는 춘향전, 심청전 등 창극을 하였다. 협률사는 한 번 공연가면 2∼4일씩 5, 6군데를 약 보름 정도를 돌면서 연주하였는데 한성기도 동행하였다. 그 때에 죽파는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하였고 뒷부분에 하는 창극에서는 향단 역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죽파 13세 되던 해, 한성기는 죽파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며 죽파의 집을 떠났다.
가야금산조의 유파 중 김죽파류처럼 두터운 연주자 층과 저변확대가 된 유파도 드물다. 국악계에서는 이러한 유파를 보통 '가문'이라고도 표현을 하는데 '김죽파 가문'에는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수두룩하다. 양승희(梁勝姬), 문재숙(文在淑), 박현숙, 서원숙, 송화자 등 국악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들은 대부분 김죽파선생님께 사사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죽파는 산조의 효시라 일컫는 김창조(金昌祖 1865-1919)의 손녀이고 한성기(韓成基 1899-1950), 김죽파로 이어지는 가야금산조의 법통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다른 산조의 유파에 비해 김죽파의 일생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고 체계화되어 있다.
<반성해야 한다. 새벽부터 가야금공부, 하루에 5-6번 공부, 13세 해 죽파에게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며 떠났던 이야기.. 가야금전공자로 깨닫음과 그분의 천재성을 본 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드네요. ^^; 노력하며 고난을 지나야 열매가 맺어지듯좋아서 시작한 가야금의 길, 노력하며 끝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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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문재숙, <김죽파가야금산조연구>, (현대음악출판사, 2000)
양승희, <악성 김창조 선생>, (영암군, 2001)
[네이버 지식백과]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김난초이야기(1) (문화원형백과 산조, 2002.,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