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3. 10. 11. 18:43

금암 김병호 생애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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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암 김병호 출생

김병호는 일제강점기 김창조의 제자로 조선창극단, 임방울창극단에서 활동한 가야금산조의 명인이다. 1910115,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월리에서 부친 김기봉(金奇鳳)과 박연례(朴連禮)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기봉은 대금을, 숙부 김보배는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하며, 모친 박연례는 소리에 뛰어났다고 한다.

-김병호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벼슬 품계 중 종 9품에9 해당하는 능참봉을 지냈다.

-무가 집안이었지만,, 양반 집안과 같은 품세를 지니고 있었다.

 

김병호 가계도

-1929년 박대례(박연례)와 혼인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1961년 김병호의 첫 번째 부인 박대례가 사망하였다.

-1962년 김병호는 두 번째 부인인 고 오생과 혼인신고를 한다. 고오생과 김병호 사이에서는 두 아들을 이미 둔 상태였다.

금암 김병호 생애 및 활동

김병호의 자녀 중에 대를 이어 활동한 자녀는 없었으며, 막내딸인 김화자가 판소리를 잘하여,, 잠깐 활동을 하였지만, 아쉽게도 이른 35세 나이에 사망을 하고, 김병호 자녀들은 일찍 사망으로 그의 가야금산조를 이어받은 사람은 없게 된다. 다만  조카인 김덕희만이 김병호산조를 직접 전수받았다..

 

금암 김병호 생애 및 활동

김병호의 생애 및 활동

초반(1910~1929) : 김병호는 한학을 배우던 유년시절부터, 1915년 무렵, 같은 고향 사람인 김창조(金昌祖)의 문하에서 가야금산조를 배웠다김창조와 김병호는 같은 본관으로 고향(전남 영암)이 같아 음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며 타고난 음악성과 총명함으로 스승의 가락을 이어받았고, 훗날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더하여 독특한 엇모리 가락까지 짜 넣음으로써 현재 전하고 있는 김병호가야금산조를 완성하였다. 또한, 김병호는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 가야금 외에도 아쟁, 가야금병창 등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생애 중반(1930~1949) 유성기 음반 발매와 부산 권번에서의 활동

김병호는 생애 중반에 김금암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활동했다. 때문에,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이름을 김금암으로 기억하고 있다.

1936년 조선성악연구회 직속 창극좌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는 근대 최고 판소리 명창이었던 임방울 창극단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19373, 28세 때세때 <김병호는 임방울이 부른 신작구요 <천지만물가><음양전도가>의 반주로 Okeh 음반 제작에 참여한 후, 4월에서 7월 사이에 4건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이 음반들은 가야금병창과 남도잡가에 해당하는 곡목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야금병창 톡기<Okeh12047>에 녹음되어 있어 김병호가 평소 즐겨 부르던 곡목을 음반으로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금암 김병호 생애 및 활동

1938년 무렵에 김병호는 자신의 가야금산조 중머리와 잔머리를 음반으로 발매하였다. 오케레코드는 19332월 처음으로 한국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여 1943년까지 지속된 회사로, 임방울은 1933년부터 1941년까지 꾸준히 오케레코드에서 음반을 출반 하였다.. 이러한 영향 때문이었는지 김병호의 가야금산조 음반 또한 오케레코드에서 출반 되었다..

 

최근에 김병호가 동래권번에서 소리 선생으로 근무하였다는 연합아카이브의 기록이 게시되었다. 동래권번에서는 이미 1939년부터 강태홍 가야금과 춤 등이 가르치고 있었기에, 김병호는 동래권번에서 주로 소리를 담당하여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생애 후반(1950~1968): 엇모리 악장을 더한 자신만의 가야금산조 완성

1948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된 후, 1950년대 들어 여성국극이 전성기를 맞게 된다.

김병호가 1954년에 임춘앵이 이끄는 여성국극동지회 악사로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김병호는 전쟁의 종식으로 부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9 인천여자고등학교 가야금 강사로 재직하였는데, 시간이 날 때 홍타령, 육자배기를 많이 불렀다고 한다. <김호성의 회고록을 보면 경아대라는 국악원에서 가야금 김병호, 젓대에 이두칠, 시조에 장윤국이 인천 국악인들과 연주 연습하였다고 한다>

 

1960대 초에는 이두칠의 권유로 국립국악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병호는 1961년부터 1968년 작고할 때까지 국립국악원 전임 악사 및 국악사양성소 가야금 강사로 재직하였다.

또한 1962년부터 수년간 서울대학교 음대 강사로 재직하였다.

 

-국립국악원 재직 당시의 연주 활동에 대한 기록을 보면, 김병호는 가야금산조뿐만 아니라 박동진 판소리의 북 반주, 심상건의 가야금산조와 신쾌동과 원영재의 거문고 산조의 장구 반주 등으로 각종 연주회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암 김병호 생애 및 활동

 

최근 국립국악원은 미국의 음악인류학자 로버트 가피아스(Rovert Garfias)1960년대 한국을 방문해서 수집한 자료를 확보하여 공개하였다. 그 자료 중에는 김병호의 가야금산조와 아쟁 산조의 음향자료와 영상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1966618일에 로버트 가피아스가 녹음한 음향자료 38분3138분 31초 최초 분량으로 김병호의 가야금산조 다스름과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가 녹음되어 있다. 이 자료에 들어있는 <다스름><엇모리> 음원은 기존의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음반에 수록되지 않았던 것으로써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엇모리>는 김병호가 타계하기 직전에 짜 넣을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가피아스 자료 공개로 김병호의 <엇모리>는 적어도 19666월 이전에 완성됨을 알 수 있다.

 

김병호는 1968년 봄부터 병환이 점점 짙어져 그 해 8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보형은 김병호의 산조를 단단하게 뭉친 옥석과 같은 음악으로 평가하였고,

그의 산조는 마음을 울리는 깊은 농현과 다양한 리듬의 분할 등으로 인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금암 김병호 생애 및 활동

1910 11 5(음력)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에서 출생
1915년경 한학을 배우던 유년시절부터 동향인 김창조 선생에게 사사
1936년 조선성악연구회 직속 극단 창극좌 단원
1937~1939년 조선창극단으로 임방울과 함께 순회공연
1952년 피난시절 부산 동래권번 교사
1959년 인천여고 전통음악 강사
1961~1968년 국립국악원 악사, 서울대학교 및 국악사양성소 가야금 상사 역임.
1968 8월 타계,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

 

출처 : 금암 김병호산조 '원가락 프로젝트' -김남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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